4 인간의 고통
피조물의 선은 자신을 창조자에게 지적, 의지적, 감정적으로 양도할 때
피조물은 선해지고 행복해진다. 성부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영원히
성자 안에 낳으시는 그 존재를 성자되신 하나님 자신이 아들의 순종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 영원 전부터 되돌려드리는 이런 모형의 순종이
에덴에는 있었다. 피조물이 자신과 창조자 양쪽에게 기쁨을 드리는
그 순종에 성령과 천국이 있다. 그러나 무기를 내려놓아야한 반역자인
인간들이 오랜 세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군림해왔으므로 자기 양도에는
고통이 따른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인간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고통은 세상의 베일을 벗기고 악인의 영혼이 개심할 수 있는 기회이다.
고통은 세상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며 이보다 다른 무엇이
인간의 영혼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한다. 모든 것이 다 원하는대로 돌아간다에
하나님이 결여되어 있다면 무서운 일이다. 인간들은 비행기 조종사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낙하산을 준비해두지만 사용할 기회가 오지않기 바라는 것처럼
우리 삶에 즐거운 것이 있으면 그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행복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는 잔인해보이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만 백기를 드는 인간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이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겸손함과 낮아짐이 있는 자리이다.
하나님께 자아를 양도하는 행위에는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자연히 고통이 따르므로 순종하겠다는 순수한
의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을 아시는 그의 지혜와
그 선한 것을 늘 받아들이는 그의 선함에 따라 결정된다.
이성적인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자에게 양도함으로 순종을 이루어
피조물 본연의 역활로 되돌아가게 된다. 고통이 피조물의 거짓된 자족감을
깨뜨려주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그 순종하는 자에게 순종하는 의지를
통하여 흘려보내시는 힘을 가지고 행동하게 하신다.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될때에 진정으로 창조적인 자가 되므로
큰 고난을 겪으면서 용기와 온유를 갖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타락한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선과 반항하는 피조물들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악과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으로 그 악을 사용하시는 경우와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으로 고난과 죄의 회개함으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선이
있다.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복합적인 선에 불구하고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은 받을 수도 있지만 화를 면할 수 없다.
죄는 은혜를 더한다고 계속 죄를 지으면 안된다. 십자가의 죽음은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 동시에 최선의 사건이지만 유다의 역활은 여전히 악한 것이다.
이웃을 위해 순수하게 선을 행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겼고
악한 일을 하여 하나님이 그 악한 일을 사용하여 복합적인 선을 만드셨다면
그는 하나님으 도구로서 하나님을 섬긴 셈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지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게 되어있으므로 유다처럼 섬기느냐 요한처럼 섬기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악한 역활에는 악한 자가 받을 처벌을 감수해야한다.
고통은 살균 소독된 악이다. 잘못은 그 본성상 다른 잘못으로 가고 죄도
또 다른 죄로 이어질수 있으니 고통에는 그 본성 상 증식하지 않는다.
고통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따라온다. 바로 잡지않은 잘못과 회개하지 않은 죄는
그 본성상 새로운 잘못과 새로운 죄가 계속 되지만 종료된 고통은 더이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않는 증식의 성향이 없는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