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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 온지 이주가 다 되어간다.
집안을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넘치도록 주고 커틴이 잘 닫겼는지 확인하고
가스와 전기를 돌아보고 문을 잠그고 베낭을 메고 가방을 끌고 집을 나섰었다.
짧다면 짧은 역코스라 택시 잡기도 어수선하여 그곳에서 막 살림을 시작한 딸을 위한,
그냥 멸치 박스 등 건어물인데도 무겁기 짝이 없어 지금 먼 곳에 있는 그가 아쉽다.
어떤 때는 정서적인 필요보다 이런 종류의 물리적인 필요가 더 그의 부재를
느끼게한다. 이렇게 끙끙대며 가져간 멸치박스는 시드니 공항에서 빼앗겼다.
얘기를 들었지만 이미 준비한 것이라 운에 맡기자하고 가져갔는데 맥주 배가
작은 무덤처럼 나온 흰머리의 검사관은 두달 전부터는 이런 종류는 통과되지 못한다며
미안한 미소와 함께 압류하고 말았다. 식품점에서 살수 있지만 질이 나쁘면서
비싸 멸치는 좋은 선물 중의 하나인데 아쉬웠다.
그날이후 동행하였던 사촌 동생을 대접하기위해 시드니에 있는 가족들이
하루씩 맡아서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한살 차이라 나를 친구같이 생각하는
그녀가 나와 늘 동행하기를 원해 정신없이 다녔었다.
그 바람에 익숙한 곳들이지만 다시 돌아다니게 되어 몇년 간의 해후가 가져오는
낯가림을 단축할 수 있었다. 이번 시드니는 여름이 거진 없었다고 한다.
짧은 면티를 입을 수 있는 날이 드물었고 선선하면서 비가 늘 많았다고 한다.
그동안 오래 계속된 가뭄이 해갈되어 좋은 일이지만 기후가 돌연변이처럼 이상하게
변하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부터 근 일주일은 날씨가 화창하게 좋아
가족들은 사촌이 복이 있다고 말했다. 시드니는 바다가 보기좋은데 바다의 빛갈은
하늘에 달려있다. 하늘이 맑고 청명하면 바다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각종의 푸르름의 색을 내어 가슴을 흔든다. 그 빛나는 푸른 색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창조주를 향한 감사와 감탄이 흘러나온다. 날씨가 흐리거나 먹구름에서 미친듯 빗발이
쏟아지거나 하는 날에는 바다는 검으칙칙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기 힘들다.
바다와 하늘의 사이는 샴 쌍둥이와 같다.
이제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고 딸아이가 거처하는 곳으로 왔다.
집안에는 세관에서 찾은지 며칠 되지않은 푸르지않은 짐 박스가 잔뜩 쌓인 곳 옆에
책상이 있고 컴퓨터가 있다. 반가워 켜고보니 인터넷이 된다.
우선 메일을 체크하고, 서울처럼 빠르지 않지만 그래도 성능이 전에 이곳에 있을 때보다
좋아져있다. 이곳에 앉아 아이가 식사를 마련하고 그애가 다음 주부터 직장을 나가니
함께 돌아다니고 그동안의 떨어져 산 거리감이 사라지고 없다.
가슴이란 신기하다. 반가운 가족들과 해후하고 오랫동안 살다간 곳이었는데도 바삐
돌아다니는 중에 가슴 한구석을 파고들던 적요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차나 사람의 인파에 쏠리지않으면 도무지 길을 갈 수 없는 서울에 빈 집 외는 남겨놓고 온
것이 없지않는가. 이 곳의 풍경. 숲과 나무들의 행진에 차들이 가끔 지나가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보기 힘든 이곳 풍경의 빈여백이 가져다주는 허함인가.
아니면 다른 이목구비와 머리 색들 속에서 아직 핀트를 맞추지못한 나의 늦장 때문인가.
한국에서는 산들 조차 머리를 맞대고 연이어 연이어 이어져서 산맥들을 이루고 있다.
국토 어디를 보아도 손바닥 한뼘의 땅도 쉬는 곳이 없을 정도로 알뜰하게
뭔가를 심어기르지 않으면 아파트라도 짓는다. 이곳의 훌렁훌렁 하게 서있는 집들 주위로
무성한 푸르름를 감싸고 있는 적요가 숨을 죽이게한다.
해후의 반가움과 그 풍경이 풍기는 감상과 지난 날에 대한 그리움이나 후회, 앞 날에
대한 궁리 등이 우리들과 함께 돌아다닌 지난 며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