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
세째 딸 유감
another woman
2008. 6. 3. 14:15
이번이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고 강조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로스안젤레스에 사는 남동생 집에서 벌써 세밤을 잤다.
피곤도 어느 정도 풀린 우리를 올케는 어떻게 해야 잘해줄지
궁리하고 데리고 다니느라 피곤하리라 짐작되지만 명랑한 그녀와
오후 외출 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되었다. 그녀도 세째딸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시어머니가 되시는 어머니를 옆에 두고 한국의 어머니들의
아들에 대한 이상한 집착에 대하여 성토(?)를 하였다. 올케의 어머니도
딸 셋에 아들이 둘인데 딸들은 다 잘사는데 큰 아들 내외는 암으로 세상을
먼저 버려 손자들을 돌보는데 둘째 아들은 살기어려워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들어와
살면서 고부 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정집 얘기를 하며 옛날 어머니들에게
있는 아들 집착증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엮어내려간다.
육이오 이후 아버지가 고성에서 기름공장을 하실 때 나는 태어났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일터에서 바삐 돌아오신 아버지는 대문을 들어서시면서
뭐를 났소의 질문에 딸이요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뒤를 돌아 도로 나가시고
어머니는 벽을 돌아보고 눈물지셨다고 한다.
고성의 시절은 너무 어려서 한 장면 외는 기억에 나지않는다.
집 뒤에 마늘 밭이 떠오르고 너무 넓게 생각되던 마늘 밭 끄뜨머리에서
조용히 서있던 상구머리의 아주 어린아이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다음 기억은 부산으로 이주한 후의 일이다.
추석이라고 기억되는데 어머니는 추석빔으로 세 딸들에게 알록달록 이쁜 원피스를
입히셨다. 언니들은 다 입었는데 네살 반이 된 나는 기를 쓰고 그것을 입지않겠다고
반항하여 처음에는 달래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달래 입히시려던
아버지는 절대 말을 듣지않는 꼬맹이를 버릇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집 앞의 도랑에 와 안 입으면 빠뜨린다고 위협하셔도 항복하지않자
물에 빠뜨리시고는 혀를 차고 집으로 돌아가시고 일이 어떻게 되나 살펴보러오신
친척 아주머니가 집으로 데리고 가 씻기고 새옷을 물론 다른 옷을 입혀주시던
기억이 난다.
이상한 것은 그 일이후 저건 꼭 노가를 닮았단 말이야 나를 보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노가는 아버지의 어머니 나의 친할머니의 성이다.
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편협한 성향이 있는 세재딸이 뭔가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셨지만 작년 작고하실 때까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책감이 있다. 각설하고
어머니는 다행히 남동생을 두명 출산하셨다. 그리고 그 남동생이 너무도 귀하여
딸인 나와는 사사건건 차별을 하셨다. 원래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여
드러나지않으나 확실하게 늦게 본 아들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기른 남동생들은 가정을 꾸리고 자기들 살아가느라 바빠 어머니
생각을 자주 하지못하지만 어머니는 자나깨나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아들 순례에 나선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면서 나는 처음 어머니의 차별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 다 늙으셨지만 아직도 소녀같은 분위기가 남아있는
어머니는 겸연쩍게 웃으시며 너도 셋까지 딸만 나아봐라 하신다.
요즈음은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고 딸만 둘이면 금메달이라는
사실을 어머니는 모르신다.
소녀시절 늘 저녁이면 어머니와 큰언니를 위주로 이야기 꽃이 피고 마지막은 성불사의
밤이나 베사메 무쵸 등으로 노래를 뽑던 시절 늘 나는 옆에 있었지만 끼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끼리만 속닥이고 없는듯 있었던 나는 설흔이 넘어가자
어머니와 언니들 사이에 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몇년전 호주 생활을 접고
서울로 가자 뒤에 남은 언니들과 어머니는 네가 없어 허전하다고 성화를 한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셋이 하던 수다를 둘이 하니 재미가 덜한지 서로도
잘 만나지않게 된다고하니 그동안 쌓인 셋째딸 유감(?)이 좀 덜어지는 것 같다.
로스안젤레스에 사는 남동생 집에서 벌써 세밤을 잤다.
피곤도 어느 정도 풀린 우리를 올케는 어떻게 해야 잘해줄지
궁리하고 데리고 다니느라 피곤하리라 짐작되지만 명랑한 그녀와
오후 외출 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되었다. 그녀도 세째딸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시어머니가 되시는 어머니를 옆에 두고 한국의 어머니들의
아들에 대한 이상한 집착에 대하여 성토(?)를 하였다. 올케의 어머니도
딸 셋에 아들이 둘인데 딸들은 다 잘사는데 큰 아들 내외는 암으로 세상을
먼저 버려 손자들을 돌보는데 둘째 아들은 살기어려워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들어와
살면서 고부 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정집 얘기를 하며 옛날 어머니들에게
있는 아들 집착증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엮어내려간다.
육이오 이후 아버지가 고성에서 기름공장을 하실 때 나는 태어났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일터에서 바삐 돌아오신 아버지는 대문을 들어서시면서
뭐를 났소의 질문에 딸이요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뒤를 돌아 도로 나가시고
어머니는 벽을 돌아보고 눈물지셨다고 한다.
고성의 시절은 너무 어려서 한 장면 외는 기억에 나지않는다.
집 뒤에 마늘 밭이 떠오르고 너무 넓게 생각되던 마늘 밭 끄뜨머리에서
조용히 서있던 상구머리의 아주 어린아이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다음 기억은 부산으로 이주한 후의 일이다.
추석이라고 기억되는데 어머니는 추석빔으로 세 딸들에게 알록달록 이쁜 원피스를
입히셨다. 언니들은 다 입었는데 네살 반이 된 나는 기를 쓰고 그것을 입지않겠다고
반항하여 처음에는 달래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달래 입히시려던
아버지는 절대 말을 듣지않는 꼬맹이를 버릇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집 앞의 도랑에 와 안 입으면 빠뜨린다고 위협하셔도 항복하지않자
물에 빠뜨리시고는 혀를 차고 집으로 돌아가시고 일이 어떻게 되나 살펴보러오신
친척 아주머니가 집으로 데리고 가 씻기고 새옷을 물론 다른 옷을 입혀주시던
기억이 난다.
이상한 것은 그 일이후 저건 꼭 노가를 닮았단 말이야 나를 보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노가는 아버지의 어머니 나의 친할머니의 성이다.
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편협한 성향이 있는 세재딸이 뭔가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셨지만 작년 작고하실 때까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책감이 있다. 각설하고
어머니는 다행히 남동생을 두명 출산하셨다. 그리고 그 남동생이 너무도 귀하여
딸인 나와는 사사건건 차별을 하셨다. 원래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여
드러나지않으나 확실하게 늦게 본 아들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기른 남동생들은 가정을 꾸리고 자기들 살아가느라 바빠 어머니
생각을 자주 하지못하지만 어머니는 자나깨나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아들 순례에 나선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면서 나는 처음 어머니의 차별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 다 늙으셨지만 아직도 소녀같은 분위기가 남아있는
어머니는 겸연쩍게 웃으시며 너도 셋까지 딸만 나아봐라 하신다.
요즈음은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고 딸만 둘이면 금메달이라는
사실을 어머니는 모르신다.
소녀시절 늘 저녁이면 어머니와 큰언니를 위주로 이야기 꽃이 피고 마지막은 성불사의
밤이나 베사메 무쵸 등으로 노래를 뽑던 시절 늘 나는 옆에 있었지만 끼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끼리만 속닥이고 없는듯 있었던 나는 설흔이 넘어가자
어머니와 언니들 사이에 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몇년전 호주 생활을 접고
서울로 가자 뒤에 남은 언니들과 어머니는 네가 없어 허전하다고 성화를 한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셋이 하던 수다를 둘이 하니 재미가 덜한지 서로도
잘 만나지않게 된다고하니 그동안 쌓인 셋째딸 유감(?)이 좀 덜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