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

제목 없음

another woman 2009. 12. 30. 16:16

오리털을 얇게 핀 잠바나 외투를 입고 머풀러를 목에 칭칭 감고도

찬바람에 자꾸 어깨가 움추려들고 고개를 숙이고 걸음이 빨라지던

그곳의 골목길들이 이 더위 속에서 머리에 떠오른다.

쨍쨍한 햇살이 더욱 강해가는 오후에, 비록 차 안이지만 드러난 목덜미와

팔에 햇빛이 자그맣고 벌건 알러지인 반점을 솟게한다. 몸에 알러지를

돋게하는 햇살을 피할 생각은 하지만 아무래도 모자나 선그라스를

챙기는 습관이 몸에 배이지않아 서울에서의 그 여름 날 한강 변이나

시내에서, 올레에서 태워 검으스름해지고 기미가 많이 끼인 얼굴에

또다른 검으스름한 태양의 흑점들을 보태가고 있다.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이 흰 얼굴이 왜 이리 되었냐며 한번 그렇게 되면 회복하기

쉽지않으니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라고 한지 얼마되지않건만 다시

햇살의 나라로 와서 햇살 속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져있다.

 

오자마자 우선 방방이 불이 나간 전선을 손보고 전구부터 갈았다.

블론드 머리에 코가 큰 기술자는 주말이라며 더블 차지를 하였다.

다음으로 수도꼭지를 갈고 세면대를 바꾸고 화장실 물 새는 곳들을

고쳤다. 급한 것들을 마치고나니 이제는 그동안 떨어져있어도 간간히

떠오르던 지인들을 만나느라고 바쁜 며칠을 보냈다.

장소에 길이 드는 성품인지 몇 달 만에 오고도 왠지 낯가림을 하는

아이처럼 마음 속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며칠을 겪어야했다.

갈피를 못잡고 쩔쩔 매는 나를 다소 냉정하게 조소하며 바라보는

나도 나이고 울창한 숲과 나무들의 변함없는 초록들과 무심히 지나가는

차들 외에는 사람이 다니지않는 터엉 빈 길들이 마치 이세상에서 처음

보는 풍경인듯이 낯설어 하는 나도 나자신이다. 그동안 부재의 흔적이

곳곳마다  나타나있다. 먼지 쌓인 창 턱에 그물을 친 작디 작은 거미부터

베란다에 그득한 마른 나뭇잎들과 앙상하게 메말라 버려진 가지들.

누군가 빗자루로 쓸어주지않고 유기 당한 페허같은 뒷마당. 그동안 알아왔지만

참으로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는 지인들에게서 그들의 눈가에 늘어난 주름살이나

턱선이 조금 부은 듯이 탄력이 사라져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이민자들이 지닐 수 밖에 없는 어떤 열심과 좌절의 갈등 속에서지만 가졌던 

젊은 날의 열정들이 사라진, 포기일지 단념일지 세월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어쩌면 편안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미소가 정겹기도하지만 잠시

서로의 말문을 조금 격앙되이 열면서 그동안의 격조했음을, 그 기간동안

서로의 관계에 덮였을 엷은 그늘을 느끼는 것이다.

 

그날 모임이 늦은 밤이 되서야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찬 탓인지

자스민의 짙은 향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짙었다. 그 짙은 향기 속의 어둠

서서히 솟아오르는 지난 시절의 망령과도 같이 덮쳐오는 기억들, 기억들...

집앞 언덕으로 나라비로 피어있는 흰장미들에서도 짙은 향기가 안개처럼

뿜어올려 언덕을 흘러간다. 꽃햘기 알러지가 있는 나는 가슴이 턱 막히고

지난 시절의 고개고개 마다 가슴을 흔들어대던 일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 실체가

없지만 어둠의 숨결을  흔드는 날개짓으로 가만히 흔들며 닥아온다.

고개를 들어보아도 끝이 보이지않는 괌트리 가지들을 올려다보며, 아아 깊은

함정과도 같은 밤이구나 하면서 찾아오는 병을 예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