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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another woman 2010. 7. 20. 17:18

 

 

저자 윌리엄 포크너는 1897년 9월 25일 미국 미시시피주의 뉴올버니에서 출생하였다.

가족과 처가의 생계를 도와야했던 그는 작가와 무관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앤더슨의

도움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1949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1962년 7월 6일에 심장

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음향과 분노,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 등외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은유를 포함한

상징과 의식의 흐름의 문체로 인간 삶의 욕망과 현실의 냉철함에 대한 분노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무익한 항거와 허무 등을 그리고 있다.

 

캐시, 달 쥬얼, 듀이델과 바더만의 어머니인, 애디가 죽자 남편 앤슨은 평소 애디가 고향 땅,

제퍼슨에 묻어달라는 말을 지키려고 비가 몹시 옴에도 불구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쪽과 제퍼슨을 연결하는  다리들이 폭우에 다 떠내려가버려 한 나절이면 도착할 거리였으나

무려  40마일을 돌고 돌아야했다. 그 와중에 의사와 이웃들과 남편과 자식들의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동참한 이 방황과 방랑에 대한 독백으로 이루어져있다.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누워있는 애디는 평소 아버지가 산다는 것은 오랫동안 죽어있을

준비를 하기위함이라는 말을 기억하며 촛농같은 큰 눈으로 이 아들 저 아들을 바라보며,

큰 아들 캐시가 자신의 관을 만들기위해 톱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오는 죽음을 기다린다.

둘째 달과 세째 쥬얼은 3달러를 벌기위해 엄마의 임종 보기를 마다하고 마차를 타고 나무짐을

비속에 팔러갔다. 쥬얼의 친 아버지 인 목사 휘트필드는 애디가 죽어간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죄악이 애디의 입에서 나올까봐 회개하고 그녀의 남편 앤슨에게 자신이 고백하기위해

오두막을 찾아가나 이미 애디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죄가 사해졌음을 알고 기뻐한다.

 

휘트필드와의 사이에 쥬얼을 낳은 애디는 그 애를 병적으로 편애하면서 자신에 대한 죄악감에

시달렸리며 죽음이 방문할 때까지 자신이 소진하도록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다가 마침내

관 속에 누웠다.  그냥 매장하자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일축하고 가족들은 빗 속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다리가 떠내려가  강을 그냥 건너다가 노새들을 잃고 간신히 떠내려가는

관을 건지고 그 과정에서 캐시는 다리가 부러져 행로 내내 짐이 되었다. 달은 헛간에

불을 질러 잡혀서 정신 병원으로 가고 쥬얼이 목숨같이 여기는 말은 아버지는 노새로 바꾸어 왔다.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 한 듀이델은 그 행로 내내  뱃 속의 존재를 고민하며 도움을 위해

약국을 찾으나 야유를 당하고 종국에는 아버지 앤슨에게 그 돈을 빼앗기고만다.

 

시체가 썩어 부패한 치즈 같은 냄새를 풍기는 관과 그 위에 다리가 부러진 큰 아들이 누운

마차를 끌고 마을 사람들의 빈축과 돌봄으로 결국은 애디의 고향 제퍼슨에 도착하였다.

남편은 그 곳에서 아내 애디를 매장하기 위해 삽을 빌리기위해 축음기 소리가 나는 집에

들어가서 삽을 빌려왔다. 아내를 매장한  남편 앤슨은  딸에게 빼앗은 돈으로 틀이를 하고,

삽을 빌려준 여자와  비열하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나 아이들에게 새엄마를  소개한다면서

소설은 끝이났다. 소설 내내 흐르던 어둡고 비참한 내용과는 달리 좀 뜻밖이었던 결말이

왠지 코믹하고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을 주었다.

 

조상 대대로 어둡고 가난하고 척박한 자연에 사람들은 휘둘리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남부의 빈농들의 생활과 그들의 신앙관이 보인다. 이웃인 코라는 애디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루하루 속죄하며 산다지만 그녀는 말한다. 인간이 속죄하며 자기의 죄악과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오만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니 인간이  단지 해야할 일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위해 목소리를 높여야하는 것, 죄악을 징계하시고 시련과

고난을 통해 구원을 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디는 그녀에게 죄악과 구원은 그저 말로

끝나는 단어일 뿐 자신의 죄악과 고통을 홀로 담당하며 구원에 대해서는 마음이 없다,  

오직 자신의 십자가이며  구원으로 여긴 것이 쥬얼인지 자신을 버린 휘트필드 목사인지

죽은 자는 말이 없어 끝까지 잘 분간이 안되었다.

 

부부는 젊음을 함께 했고 함께 늙었고,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괜찮다, 괜찮다

말해왔다. 슬픔과 시련으로 가득한 험한 세상에서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은 진실이라,

죽은 아내가 고향에 묻히도록 남편 앤슨이 몹시 애를 썼다. 그러나 아내를 파묻은 삽자루를

놓자마자, 그간의 갈등 묘사도 없이  축음기를 가진 눈이 튀어나온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오는

모습이 의아했다. 아마 작가가 서술하지는 않았으나 아내의 부정으로 깊은 내면에 상처를

받고 기회가 생기자마자 작은 보복의 행동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축음기가 소원인 큰아들

캐시도  싫어하지않고 듀이델과 망내는 바나나를 먹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안도하는

모습에 역시 산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구나, 어두운 내용 였음에도 미소를 짓게된다.

 

며칠에 걸쳐 40마일을 죽을 뻔고생하며 돌아돌아 제퍼슨으로 가는 동안  관 속에 누워

냄새를 풍기는 아내와 엄마에 대한 기억과 자기들의 심정을 독백으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있다. 그 독백의 과정과 관을 호위하고 헤매이는 과정에서 서로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었고 그 관계에서 생긴 회한이 정리되고, 애디를 그녀가 소원하던 그 

땅에 묻는 과정에 걸쳐  남은 가족들은 새로이 살아갈 마음과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내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애디는 자신의 고향으로 자기를

데리고 와 묻게함으로서 남은 가족들에게 다시 앞을 향하여 전진하며 살아나갈 수 

있도록 또 다시 이어질 생의  문으로 인도한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