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어요.
어느 날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얼마나 센 바람인지 몸이 바람결에 그만
날라갈 것 같아 중심을 잡느라고 한동안 휘청였지요.
노천 카페의 의자가 굴러갑니다. 길가에 세워둔 광고판이 넘어집니다.
야자수 나뭇가지들이 감으려고 냇물에 담은 긴머리채처럼 바람이 부는
쪽으로 휘돌아집니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도 무엇인가 쾅 너머지더니
마음이 막 설레이기 시작했어요. 갖가지 상념들이 승강장을 벗어나
재빠르게 달아나는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지나갑니다. 이상하지요.
살면서 기쁘고 좋았던 적도 참 많았는데 먼저 번개같이 솟아오르는 생각은
이루지못한 것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이나, 뭐 회한이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이 깊은 유감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르다니요. 머리에 흰 서리를
인 노인처럼, 서정주의 국화꽃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내 마음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여겼건만 별 수 없이, 이루지못한
소망이나 욕망을 아직도 이 가슴 어딘가에 감추고 지냈나봅니다.
한참을 유감스럽다가 그다음에야 마지못한듯 기뻤던 기억들이
떠올랐지요. 그런데 왜 가슴은 설레이는지, 재단사가 손님의 양복을
소중히 재단하듯이 그렇게 살아오지못했습니다. 이 삶이 창조주가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이 세월이 아직 덜 흘렀을 때 들었었다면, 좀더 겸허하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지않았을까요.
내 손아귀에 든 내 삶이어서 어처구니없이 낭비하고 게으르게 쉽게 살아오지
않았는가요. 이윽고 바람이 멎자 카페 주인이 넘어져 저만큼 굴러간 의자를
모으고 광고판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카페 구석에 앉아 불어제키는 바람에
큰 눈을 떼지못하던 그녀는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식은 커피를 마셨습니다.
흰 눈도 나리지않고 얼음도 얼지않지만 그래도 퍼런 겨울은 한 바탕
요란을 떨더니 지나가고, 별안간 봄이 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