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

봄이 왔어요.

another woman 2010. 9. 9. 14:17

 

 

 

어느 날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얼마나 센 바람인지 몸이 바람결에 그만

날라갈 것 같아  중심을 잡느라고 한동안 휘청였지요.

노천 카페의 의자가 굴러갑니다. 길가에 세워둔 광고판이 넘어집니다.

야자수 나뭇가지들이 감으려고 냇물에 담은 긴머리채처럼 바람이 부는

쪽으로 휘돌아집니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도 무엇인가 쾅 너머지더니

마음이 막 설레이기 시작했어요.  갖가지 상념들이  승강장을 벗어나 

재빠르게 달아나는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지나갑니다.  이상하지요.

살면서 기쁘고 좋았던 적도 참 많았는데 먼저 번개같이 솟아오르는 생각은

이루지못한 것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이나, 뭐 회한이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이 깊은 유감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르다니요. 머리에 흰 서리를

인 노인처럼, 서정주의 국화꽃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내 마음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여겼건만 별 수 없이, 이루지못한

소망이나 욕망을  아직도 이 가슴 어딘가에 감추고 지냈나봅니다. 

한참을 유감스럽다가 그다음에야 마지못한듯 기뻤던 기억들이

떠올랐지요. 그런데 왜 가슴은 설레이는지, 재단사가 손님의 양복을

소중히 재단하듯이  그렇게  살아오지못했습니다. 이 삶이 창조주가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이 세월이 아직 덜 흘렀을 때 들었었다면, 좀더 겸허하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지않았을까요.

내 손아귀에 든 내 삶이어서 어처구니없이 낭비하고 게으르게 쉽게 살아오지

않았는가요. 이윽고 바람이 멎자 카페 주인이 넘어져 저만큼 굴러간 의자를

모으고 광고판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카페 구석에 앉아 불어제키는 바람에

큰 눈을 떼지못하던 그녀는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식은 커피를 마셨습니다.

 

흰 눈도 나리지않고 얼음도 얼지않지만 그래도  퍼런 겨울은 한 바탕

요란을 떨더니 지나가고, 별안간 봄이 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