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화더
아주 오래 전 한국에 나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유난히 우는
아이가 있었다. 등치가 큰 한 호주남자가 6개월 된 한국 여자아이를 안고
절절 매고 있어 대신 아이를 안고 달래며 왔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엄마를 떠나 입양가는구나하는 생각에 언짢았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79년 6살 성진철은 미국의 한
단란한 중산층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다. 애런 베이츠는 애리조나 주립대학
대학 재학 중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군에 입대하여 한국으로 파병받았다.
그가 찾은 아버지는 사형수로 감옥에 있었다. 아버지와 눈물로 재회한 그는
아버지의 사형을 면하게 하기위해 서명 운동 등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것을 알게된다. 그러나 성진철은
비록 유전학적으로 아버지가 아니지만 자신의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있는
그를 영원한 아버지이라고 인정하고 사랑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일부러 애쓰고
노력해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속의 깊은 선한 샘물 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천적인 은혜가 담긴 성품이라고 생각된다.
남자답게 생기고 눈빛이 다정하며 활기가 넘치는 애런 베이츠의 인터뷰
장면이나 그가 친구와 아버지 구명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남았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공은철, 영어 이름은 제임스인 그는 한국에 와서
방송에 나가 부모를 찾고 아버지되는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은철이 가지고있는 어린 시절의 사진과 똑 같은 사진을 갖고
있었다. 22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사형수였다.눈물로 재회를 한
아버지는 자신이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했지만 알고보니
자신을 업신여기는 두 모자를 분노로 무참하게 토막살인을 하였었다.
사실을 알게된 제임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속인 사실에 분노하며
갈등하나 결국은 그가 자신을 세상에 있게한 유일한 분이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눈물로 사랑합니다라고 호소한다.
그전에 제임스는 그가 자신의 유전자가 일치하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것을 알게되나 자라면서 늘 그리워한 아버지를 아버지 그 자체로
인정하고 영원히 자신의아버지라고 사랑을 고백하는사실이 놀랍고
감동되었다. 요즈음 효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독거노인도 많고
이해관계에 따라 존속살인도 가끔 보도되는 세대에 어둠을 비추는
한줄기 밝은 불빛같이 여겨진다.
여기와서 만난 어느 친구는 아들 하나 낳고 시드니로 왔다. 오래 사귀던
남자의 부모가 집안이 기운다고 결혼을 반대하자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남자는 부모들이 주장하는 곳에 결혼을 하고 두 모자를
외면하자 여자는 친정이 살고 있는 시드니로 왔다. 자라는 내내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재혼에 얽힌
복잡함으로 친구를 괴롭히며 반항하던 아들은 우여곡절 끝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고 참한 호주아가씨를 만나 결혼도 하였다.
친구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만나게해주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아들은
내게 아버지는 없다고 철저하게 외면한다고 한다. 마음의 한을 풀지않는
아들과 그를 바라보는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아직도 해외입양의 비율이 줄어들지 않는다. 입양시키는 부모는 오죽하면
그렇게 할까 이해도 되지만 너무 여러가지 경우들이 많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자식은 꼭 제가 길러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꼭 그럴 수 있다고
단정을 내리기 어렵다. 입양된 곳이 아무리 잘살고 문명된 사회라하더라도
입양이 어려운 곳에 되어 외롭고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도 너무 많다.
피부색이 다르고 평생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산다면 아무리 달동네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욕지거리 속에서 산다고해도 뭔가 정체성의 혼돈에서
오는 뼈저린 외로움과 버림받은 자라는 형벌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존재가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각인은 무의식 속에서 굳센 성벽으로
자리를 잡아 평생 거절당한 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애런 베이츠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고 피치못할 사정으로 자신을 입양보낸 아버지이지만
그가 살아있을 동안 찾아내어 22년 간의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사랑합니다로
눈물로 고백하면서 그동안 쌓였던 그리움과 한을 풀어버리는 은총이 있었다.
남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그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길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라고
그 분은 가르치셨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온갖 분노와 해악이
자신의 영혼과 육신에 쌓여서 결국은 자신을 해충처럼 살그머니
철저하게 갈가먹어 그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을 그 분은 아셨다.
그러나 돌아가는 이치는 알아도 말씀대로 행하기 쉽지않다. 자신의
처지와 감정에 주장하는대로 끌려가며 시달리는 모습이 한계를 가진
육신을 가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애런 베이츠의 그 다정하고
굳센 시선이 더욱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