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

호주에 대한 짧은 소개

another woman 2012. 1. 30. 07:57

한 상대 교수님이 예배후 오후 시간에 강의하신 내용이다. 방대한 내용을

짧은 시간 안에 해야함으로 완전이 요약된 것이지만 몰랐던 내용도 있어서

유익하였다. 사진들과 내용이 교수님 강의안을 올리는 것이다.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며 대륙이다. 한국이 겨울 릴 때 여름이며 우기는

겨울 건기는 여름이며 북향집이 좋다. 자동차 핸들이 우측에 있다.

면적은 남한의78배, 2011년 말 통계로 인구는 2천 2백 80만명이다.

국립공원 557개중 세계 유산이 15개이며 아름다운 해안들과 2000km가 넘는

산호초 해안이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약 6만 칠천불로 추정된다.

열대, 아열대, 온대로 이루어져있으며 대륙의 많은 부분이 붉은 흙 사막이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빈공간이며 지하호수와 광산물이 많이 저장되어 있다.

하늘과 바다의 푸른색, 나무의 초록색 내륙 사막의 붉은 색이 호주를

상징하는 색갈이다.

 

호주는 1770년 James Cook 선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견된다. 쿡 선장은

세계와 천문 지도 완성을 위해 타히티 섬에 파견나갔다가, 당시 해양제국주의

인 영국이 세계정복을 위해 배가 많이 필요하고 돗대에 쓸 나무를 찾기위해

남태평양을 탐험하였다. 그는 이스터 섬을 발견하고 뉴질랜드를 거쳐 북으로

가다 호주 멜본 근처에 정박하고 시드니로 와서 이 대륙이 영국령 임을 공포하는

식을 갖고 그 곳이 New South Wales라고 명하였다. 영국은 산업혁명 과정에서

넘쳐나는 범죄로 형수소 수용 능력의 6배로 죄수가 불어나자 그들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never never land인 Australia로 보내기로 했다.

1777년 7월 1030명의 죄수들을 태운 Endeavour 호는 1778년 1월 26일 도착하여

1월 26일이 호주의 건국 기념일이 된다. 지금의 The Rocks에 호주의 첫 마을을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인 시드니가 된다. 죄수들 중에 영국의

산업혁명기간 높은 계급의 횡포에 반대하던 사상범, 정치범들은 형기를 마친 후

호주의 건국이념을 세우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평등한 일계급(Mono class)

사회와 대중서민 사회를 이루는 평등주의(Egalitarianism)가 건국 이념이 되어

지금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수입의 40% 이상을 세금으로 징수하여 못사는

사람들에게 복지를 돌린다. 5대 총독 멕퀴리는 선정을 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시켜 곡물을 재배케한다. 영국에서 온 농업학자 James Ruse가

이들을 오왔는데 그의 이름을 딴 학교는 아직도 명문학교로 유명하다.

다방면에 걸쳐 기간산업도 발전시킨 멕퀴리는 모함을 받아 영국으로 소환되어

실의에 차서 그 곳에서 죽는다. 부인 멕퀴리는 남편의 무죄를 믿으므로 매일

언덕의 바위에 앉아 남편을 기다렸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멕퀴리 부인의 의자는

지금은 관광코스가 되었다. 호주인들은 그를 그리워해서 강, 산, 대학,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기렸다. 멕퀴리 총독을 모략했던 맥아더는 영국정부에

목축을 제안하여 Merino 양 목축시험 이후 목축 이민자들이 몰려오고 지금도

세계의 75%의 양이 오세아니아에 있게되었다.

 

`1851년 호주 여러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전 세계에서 노다지꾼들이

몰려오고 금광은 주로 꾸리라고 불렸던 중국인 노동자 4만명의 노동이 필요했다.

1851-1900년 호주는 세계 초고의 부자나라가 되었다. 그 당시 인구는 150만명

정도였는데 죄수 출신, 목축업자, 금광붐을 따라온 사람들이 각각 50만명은

된다고한다. 그 후 백인은 호주 원주민들을 약 5백만 명을 사냥 식으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시드니 지역에 살던 쿠링가이족 3만명은 우물과 냇물에 독을

타 사흘 만에, 타스마니아에서는 원주민을 투르가니니(1812-1876)라는 한 여자만

기념으로 남겨놓고 몰살 시켰다. 투르가니니는 죽으면서 고향에 묻히기를 소원했으나

백인은 그녀의 머리 만을 포르말린에 담아 영국으로 이송했다. 현재 남은 아브로진으로

불리는 원주민은 47만 명 정도이다. 또한 돈을 악착같이 모으는 중국인들의 재산을

탐하여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4만명의 중국인들이 이천명이 남게되었다.

 

1855년 이민법을 모든 직업과 혜택이 백인 중심으로 정하여, 이 법은 110년 동안

세번 수정되면서 더욱 강화되어 백호주의라고 불리워졌다.

1901년 연방정부를 수립하여 New South Wales, Victoria, Queenland, South Australia,

Western Australia, Tasmania 6개 주와 Australian capital Territory(canberra) Northen Territory

emd 2개의 특별 지역이 있다. 멜버른과 시드니를 오가면서 중요한 정치를 논해오다가

중간 지역 캔베라에 수도를 만들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평지역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하고 1962년에 한국과

국교를 맺고 대사관을 세웠다. 1960년대 중반 신 맑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지나친 백호주의에 반발하여 1965년부터 백호주의는 중지되었고 그후 아시아 계통의

이민이 급정하였다. 한국인은 1966년 호주인과 결혼한 한국 국적의 부인들, 8명이

영주권을 획득하였다. 그후 2년동안 지질학자와 파일러트들의 수십 가족이 들어왔다.

1975년 월남전이 끝나자 1천여명의 한국인이 10일 관광비자로 들어와 불법체류를

하다가 사면령을 받아 사천명의 합법적 영주권자가 생겼다. 그 소식을 들은 독일 광부,

간호원 남미 등에 있던 사람들이 입국하여 1980년도 이차 사면령으로 교민 수가

일 만명이 넘게되고 대부분 시드니에 정착하여 청소업에 많은 사람이 일했다.

서쪽 지방에 거주한 이들은 가족은 퍼스에 두고 혼자 북쪽에 가서 용접일을 했다.

1980년대는 형제 초청과 사업이민자가 많아졌고 근래에는 유학생들을 포함하여

15만 정도의 교민들이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