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동물원
테네시 윌리암즈의 유리 동물원은 고등학교 다닐 때 읽었었다. 제목을 보자 세세한 내용은 떠오르지않고
그때 그 나이에 걸맞았을 풋내 나는 감수성 탓이었는지 며칠을 잠을 설치며 로오라 가족이 만들어내는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였었던 기억만 떠올랐다. 그것으로 독서토론을 했던, 그 당시 미도파에 있었던
국립 도서관에서 김인홍 동국대 교수님의 인도하셨던 독서클럽 상지회 회원들의 열띤 얼굴들이
오래간만에 떠올려졌다. 참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사는 곳을 이역만리 바꾸어다니며 서로 연락을 못한
관계로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 수 없는 선후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얼굴은
헤어졌던 그 당시의 앳띈 얼굴로 떠오르니 왠지 세월이란 강물에 휩싸여 둥둥 이 곳까지 흘러온
것은 혼자인듯한 착각도 든다.
테네시 윌리암즈의 유리 동물원은 아만다 윙필드와 이 극의 해설자이며 아들인 짐과 작은 장애를 가진
딸 로오라 윙필드와 짐의 친구 톰, 네 사람이 출연한다. 남부 출신인 아만다 윙필드는 한창의 미혼
시절 열 일곱 명의 신사들의 방문을 받으며 춤과 사교 생활을 즐기었으나 남부의 농장주의 자제들과
결혼하지않고 도시출신 전화국에서 일하는 남편의 구애를 승낙하였었다. 두 아이를 낳고 살던 남편은
어느 날 장거리 전화로 채팅을 하던 여자를 찾아 떠난 후 십육년 만에 잘있냐 잘있으라의 단 두줄의
소식 이후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후에도 그가 아주 매력있는 남자였으며
자신은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고 아만다는 생각한다. 유리 동물을 수집하며 언제나 낡은 축음기를 틀고
집안에 틀어박혀 사는 누이와 늘 잔소리를 끊이지않는 어머니를 부양하기위해 구두가게 창고에서 일하는 짐은 늘 아버지처럼 멀리 떠나고 싶어한다. 그는 혼자 가족을 부양하는 소망없는 생활에서 피하기위해
밤마다 영화관에 가고 술을 마시며 시를 썼다. 어머니인 아만다는 짐이 앞날을 힘차게 발전시키지않고
늘 우울하게 집을 떠나고싶어하는 것을 비난하고 잔소리를 끊이지않는다. 오래전에 사라진 남부 농장의
풍부했던 기억에 사로잡혀있어도 로라가 실업학교를 중퇴하여 미래가 어둡자, 아만다는 짐에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감옥에 스스로 유폐되어있는 로오라의 신랑을 찾아주기를 강요하고 짐은 친구 톰을 초대하였다. 고교시절 활발한 활동을 하던 짐을 연모했던 로오라는 그가 자신이 학창시절의 푸른장미로
알아보고 누구보다 아름답고 특별한 여인이라며 입을 맞추자 로오라는 마치 다른 여자가 된듯 밝아진다.
그것을 본 짐은 자신에겐 결혼을 약속한 베티가 있다고 고백하고 로라에게 열등감을 버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라며 사라졌다. 자신의 이쁜 점을 찾아 꺼집어내어 생명을 점화시키던 톰이 잠시 후 약혼자가
있음을 밝히고 가버리자, 절망한 로오라는 다시 밤이 찾아들듯 유리동물원이 있는 자신의 감옥으로
돌아간다. 실망한 아만다는 애인이 있는 남자를 집에 데려와 돈과 희망을 낭비시킨 짐을 비난하며
다투었다. 짐은 구두박스에 시를 쓰고 해고당하자 집을 나가 이 도시 저도시를 방랑하며 살았다.
짐이 없이 살아낼 두 모녀의 절망과 빈곤과 고립은 더 심해졌으나 로오라는 촛불을 키고 살아낸다.
외로움과 향수에 젖어서 방랑하던 짐은 어느 도시 윈도우에서 로오라의 환영을 느끼고 그녀에게
촛불을 끄라고 마음으로 얘기한다.
미국의 빈민의 생활이 화폭의 그림이 연결되듯이 장면들이 떠오른다. 열등감과 자신감의 결여로
스스로가 만든 유리동물원의 세계에서 사는 로오라는 꼭 쥐기만해도 부서져버리는 투명한 유리동물처럼
고요하고 연약하다. 짐은 하고싶지않은 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의무를 벗어나 방랑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고 아만다는 그런 짐을 비난하고 몰아세워 가정을 힘들게 이끌어간다. 이 가정의 구성원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아만다를 제외하곤 결코 끝나지않을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막막한 심정에
함몰되어있다. 엄마인 아만다의 살아보려는 의지는 아마 두 자녀들인 짐과 로오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 결혼도 하지않고 자신의 육신을 통해서 나온 아이들이 없는 미혼의 두 젊은이들은 악착스레 살
의지를 갖지못할 수도 있다. 아들인 짐은 아버지의 몫까지 스스로 감당해야하는 것에 대해 앞 날이
막막하여 결국은 떠나고만다. 극은 짐이 집을 나간 후 그저 이 도시 저 도시를 방황할뿐, 그의 심정을
설명하고있지 않다. 얼만가의 세월이 흐르면 짐은 결국 집 밖의 길에서의 생활도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깨닫게되고 집 생각이 나게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가지않는 길처럼 자신이 살고있는
반대편의 생활이 자기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허상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성정이다.
방랑의 생활과 가정의 변화없는 일상의 생활은 모양은 다르지만 뭔가의 함정에 매여있다는,
그것은 죽을 때까지 피해갈 수 없는 한 개인들의 생물학적이며 우주적 허무이다. 어디엔가 구원의
밧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깨닫지 못하는 돌출되지않는 소망들이 이 세상 누구의 가슴에라도
숨겨져있다. 그 소망을 무시하거나 추구하는 방법들이 다 다를뿐이다. 아만다의 남편처럼 가족을
버리거나 종교에 몰입하거나 로오라처럼 자신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방랑하고 싶은 갈증에
허덕이며 톰처럼 시를 쓰거나 아만다처럼 자식들을 자기의 틀에 끼워맞추려 갖은 노력으로
스스로와 자식들을 기진하게 만들거나, 길은 어디에도 있으나 그 길에서 느끼는 허망함을 피하지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깊고 어두운 허당같은 일상의 정체를 대부분은 옅게 느껴도 그냥 지나치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 삶 외는 길도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도 모른채 시지프스의 신화의 주인공들처럼
살아가다 보면, 이윽고 생명의 길의 마지막에 서게된다.
생명과 인생은 귀한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 그 생명을 향하여 세상이 온 것이라는 누군가의
싯귀처럼. 세상이 나를 향하여 올만큼 나의 생명과 인생은 귀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깨닫는 시기가 삶의 막바지에 이르를 때임이 애석하지만 아직 살고있다면 그래도
자신이 원하던 다른 삶을 위해 잠시 걸어볼, 촛불을 다시 킬수 있게,
허락된 시간은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