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현시인
일주일 간의 일정이라 짧아 아쉬웠지만
뜻밖에 동갑내기를 만나는 행운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은 늦게 등단한 시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학창시절 교지편집에 관여하면서 시인희망생들은 사귀어보았으나
시인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은 처음이었는데
왠지 첫눈에 후덕해보이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시인이란 그들의 가슴은 온갖 짙은 운무에 가려진 히말라야 산같을거라는
상상을 스쳐 그녀는 다정하고 솔직했다.
춤을 추며 커다란 덩치의 팬더에게 호감을 전하는 사진 속의 흰 원피스의
여인처럼,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시인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돌아오고,
돌아와서 그녀의 시를 찾아 읽었는데 마음에 든 두 편을 올려본다.
가령.
박 수현
가령, 한 여름 짱짱한 오후 1시를
단물 빠진 껌처럼 벽에다 붙인다면
담장너머 칼이나 가시개 가이소 막힌 아궁이나 구들장, 굴뚝도 뚫십니더 외치던
칼갈이 아저씨 쉰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요.
우물가 평상, 홍두께로 애호박 칼국수 반죽 밀다가 한걸음에 달려가는
엄마의 광목 앞치마를 잡을 수 있을까요.
가령, 토끼잠 자다 깬 오후 3시를
오색 구슬알처럼 주머니에 넣고 굴린다면 이태 만에 돌아온 엎집 아편쟁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열손가락 접었다 펼치며 그림자 놀이 하는 것들,
땟국진 손으로 봉지쌀을, 또 한 손엔 새끼줄 꿴 19공탄을 거머쥔
아홉살 난 그의 아들에게 희죽희죽 웃던 모습을 훔쳐볼 수 있을까요.
가령, 계단 참에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앉은 오후 5시를
대청마루 벽새계 태엽에 감아놓고 작약꽃 흐드러진 재실 모퉁이,
동생이 또 딸이래요라며 훌쩍이던 상고머리 계집애를, 장죽 백동부리로
땅땅, 놋재떨이 치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요.
가령, 깨진 부뚜막 타일같은 오후 7시를
석유곤로에 올려 뭉근하게 끓인다면 새알심 뜬 팥죽 한사발 맛볼수 있을까요.
그런 어스름 양철 지붕에 내려앉은 분꽃씨앗 사방으로 휘파람이라도
불어댄다면 같은 어둠이 덧댄 함석 홈통으로 빗물 내리는 소리 듣거나
금성라디오에서 흐르는 배호의 노래 아직 흥얼댈수 있겠지요.
윔홀
박 수현
복도는 빨랫줄에 얼어붙은 호청처럼 뻣뻣하고
경북대학 병원 병실 밖 풍경은 막다른 복도 밖에 가진 것이 없어서
격자 창 너머 흐린 첨탑을 세워 두었다. 4번, 5번, 6번 척추뼈를 절개한
아버지의 비명이 며칠 째 병실바닥에 흥건 했다.
맞은 편 노인은 몇 령의 잠을 갈아입었는지 미농지처럼 얇은 숨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새벽 2시, 태반을 뒤집어썼던 아기를 파손주의, 택배 상자처럼 받아
인큐베이터실로 배달하느라 부산한 발자국들, 밤새 복도에는
썩은 모과향같은 냄새들이 고여 들었다.
아침 회진시간, 의사들이 누구에겐 휠체어를 탄 어제를,
또다른 환자에겐 돌발성 난청같은 오늘을 처방했다.
어깨에 기댄 링거 걸대를 끌며 한 남자가 긴 복도를 밀고 있었다.
과일 쥬스박스를 든 여자 둘이 병실문 앞에서 기웃거렸다.
엄마는 복도 끝에서 겨울비처럼 흐느꼈다.
나는 병원 뜰, 철지난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서 어린 비들기에게 모이를 던져주었다.
죽음은 자욱하고 봄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