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그리운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흰 칼라를 단 곤색 교복을 입기시작하는 즈음 하늘은 높아지고
햇살은 강열해지는 가을이 깊어갈 즈음 즐겨 외우던 서정주의 시의
한 귀절이 떠오른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은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해가는 배와 같은지 벌써 총기는 사라져간지 오래지만
지난 날의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연관도 없이
어떤 장면이 떠올라 한참을 골몰케한다. 과거를 현재로 아시는 친정아버지의
오락가락하시는 삶의 파편들을 우리들에게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며
처음에는 연민과 짜증을 함께 느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나이에 도달하려면 아직 삼십년 하고도 더 남은 나는
벌써 아버지를 뒤따라 가기에 남김없는 소질을 발휘하고있다.
우리들은 흘러가버린 세월에 따라 육신의 쇠퇴가 있고 또 정신의 쇠약도 뒤따른다.
벌써 어제가 되어버린 한낮의 강열한 푸르름이 감은 눈시울 뒤에 가득 차서
선잠을 깨게하고 눈이 부시게 그리운 마음이 흘러넘친다.
그런 감정들을 잊고 지낸지 오래인것 같은데 절대적인 것 같은 어둠의 층에
묻혀있다가 별안간 마음과 눈앞에서 오락가락하여 삶을 도로 불러일으키는
아버지의 기억 같이 그것은 강하고 압도적이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든다고 서정주는 거듭 말한다.
여름날의 찬란하던 그 초록은 치쳐 단풍드는 것 처럼 우리들의 부단한 인생살이에서
우리들이 꿈과 소망은 지쳐서 늙어가고 쇠약해가고 병들어가기도 한다.
식물들의 꿈과 쇠락과 인간들의 꿈과 쇠락이 닮은 점이 있다.
살면서 만나고 사랑하고 키워간 꿈들이나 사람들을 헤어지고
그리워하면서 그 그리움을 키우고 그 그리움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연결되어
살고자하고 살아보고자하는 소망을 이어준다.
그러나 초록이 지쳐 단풍들듯이 인생살이의 끝자락에 다달아가고 있는
그 인간들의 생에도 어떤 날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움이나 생에 대한
욕구가 되살아나는 은혜가 이런 가을 날에는 부어진다.
특별히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에서 홀로 사는 사람에겐 자살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고한다. 반면에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고 그런 그리운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더욱 즐기고 생명감에 차오른다고하니
인간들은 관계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가을에 일어나는 강한 그리움에 지치면 초록이 지쳐 단풍들듯이
마음 속에서 무슨 형상이 이루어질까 기대해본다.
너와 나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다시 찾아오는 소망과 희망과 생에 대한
강한 그리움의 끝은 창조주에 대한 경외감과 사랑으로 매듭지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