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두번 째 받은 전화가 큰언니 시어머님의 부음이었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한달 씩 휴가를 받아 나와서 간병을 하고 들어가던 큰형부가
이번에는 정년 퇴직을 하고오는 바람에 십이월 중순이 넘어서 오게되었다.
그만 퇴원하라는 병원의 권고를 받고 집으로 오셔 며칠 지내시고는
저녁 예배를 보시는데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찬송가 두귀절을 부르는데
그만 운명하셨다고 한다. 입관 예배에 참석하러 병원에 부속되어있는
장례 안치소로 향하던 날은 남쪽 지방에서는 폭설로 비닐 하우스가 파손된다는데
이곳은 유난히도 햇살이 아직 오려면 멀은 봄기운을 담고 있었다.
형부는 노모를 서울에 두고 외국생활을 해서 늘 마음이 편치않아하셔
보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얼굴이 상해있었다.
방안 가득히 흰국화들이 진열되어 있고 몇 사람이 형부와 함께 앉아있는데
할말이 없었다. 순결함으로 피어나있는 국화 옆에 그 분이 있다.
큰언니 결혼식과 조카들이 아주 어렸을 때 몇번 뵌 그 위엄과 상냥함이 함께 있던
얼굴보다 많이 늙으신 모습이나 여전히 그 표정이 남아있다.
이미 죽은 자를 대면하는 것이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분은 돌아가셨다는
느낌이 없다. 죽은 자와 산자들의 사이에 금을 긋는 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살아서 눈 앞에서 왔다 갔다 못하지만 기억이나 마음 속에서
이미 돌아간 자들은 여전히 웃고 얘기하고 움직이고 있다.
죽음은 전혀 현실감이 없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관을 잡고 버스로 향하여 밑에 관을 싣고
우리들은 그 위의 버스 안 좌석들에 자리 잡았다.
서울을 빠져나가도록 차 안은 조용하고 분위기가 무겁다.
언니 시어머니의 이종이라는 머리가 허연 분이 분위기를 바꿀 모양인지
밝은 목소리로 오빠 동생 한다는 또 다른 노인들을 향해 어릴 때 얘기부터
침묵을 깨기 시작했다. 그분의 노력으로 차 안은 자신들이 어렸을적
오십년 전으로 돌아가 옛얘기들을 꽃을 피웠다. 차 밑에 누워계신 분이
마음이 흐믓해지셨을 것만같다.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산자들은 계속
현실 세계에서 육신을 입은 채로 환경이나 조건이나 관계에 얽힌 채로 사연을
만들어가고 죽은 자들은 시간의 그때부터 정지하여 그들의 옛날의 삶만이
산자들의 기억에서 활동하지만 그들은 전능자 우편에 앉아 땅에서 살고있는
자들에게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시리라 믿는다.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운전사는 점심을 먹으라고 차를 타고 오분 쯤 오는 곳에다
우리를 내려준다. 죽은 자는 화장터에서 불길에 휩싸여 육신이 타버리고 있고
산자들은 실내에서 부족한 햇살과 난로의 연탄가스에 시달려 초록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화초들과 작은 나무들이 심긴 화분이 창가에 죽 늘어서있는 음식점에서
닭곰탕을 한 그릇씩 앞에 놓고 식사를 한다. 모인 친척들을 생각해서 유족들도
기운없이 식사들을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다시 모이라고해서 그곳에 갔더니 창을 가리운 것이 올라가고 작게 수북한 재가 보였다.
그 때서 사진 속의 그 분이 이제 저렇게 한줌의 재가 되었구나 실감이 간다.
뼈를 가루로 만드는 동안 더 기다려야했다.
저쪽 끝 복도에서는 무슨 경인지 모르지만 경을 크게 읽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점점 빨라지며 격해지는 음성이 가슴을 난도 질 하는듯하다.
슬픔을 쥐어짜내듯 아니나 다를까 어는 여인의 격하고 슬픔에 찬 외침이 터져나온다.
옛날에 곡을 하던 풍습이 아직 남은 탓일까. 그러나 그 소리는 자신의 슬픔으로 하는
곡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외치는 절망을 닮아있어 그치지않고 흘러나오는
경소리가 안들리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남쪽에 계속 해서 내리는 폭설로 그분은 벽제에서 삼십여분 떨어진 납골당에
모셔졌다. 내년에 일주기 될 때에 형부는 다시 오셔 어머니를 선산으로 모신다고 한다.
벽제 화장터에 놓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