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딜레탕트 k님이 읽기를 권유했던 폴 오스터의 어둠 속의 남자를 지금에야 읽었다.
72세인 은퇴한 도서 비평가 브릴은 얼마전 이혼과 재결합의 과정을 거쳤던 아내 소니아를
암으로 잃고 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다. 47세인 딸,미리엄은 남편
리처드와 이혼한 이후 자신은 버림받은 여자라는 상처에 잠겨있다. 23세 난 손녀딸은
이라크의 내전 지역으로 자원하여 간 남자친구가 참혹히 살해 당한 것이 자기의 탓이라고
자책하는 그녀, 카티아와 셋이 한 집에서 살고있다. 세 사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느끼는
슬픔이 가득한 집에 살면서 밤마다 각기 다른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불면에 시달리는
브릴은 어둠 속에서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으로 만들어낸다.
오스터는 16세기 이태리에 살던, 신이 무한한 능력을 가졌다면 무한 수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브루노의 사상을 삽입하였다. 세상과 그림자 세상 속에서 누군가가 꿈꾸고 상상하는, 마음의
창조물의 세상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그는 마음 속으로 다른 세상을 생각한다.
마음은 그 자체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은 실제와 같다고 여긴다. 한밤중에 그 다른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 과거에 잠깐씩 빠져 들어도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정의한다. 인생의 혼돈이 고통스럽지만 그 카오스 속에도 아름다운 서정이 있듯이
인생은 실망스러워도 그는 딸과 손녀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밤마다 잠 못이루는 브릴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죽음을 원하여 브릭이라는 주인공을 만들어
그가 자신을 살해하도록하는 가상 세계를 상상하며 소설을 머리 속으로 쓴다. 그 소설 안에서
미국은 내전 중이고 마술사인 브릭은 납치 당한 후 하사로부터 너를 세상에 창조해낸
브릴이라는 자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아내를 사랑하는 브릭은 그 암살지령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폭팔로 자신이 예기하고 거절치않은 죽음을 아내와 함께 당하게된다.
그리하여 가상의 세계에서도 자신의 죽음이 여의치않자 브릴은 현실의 딸과 손녀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불면의 어느 밤 손녀 카티아가 브릴과 오랫동안 이야기한다. 브릴과 소니아의 일생에
일어났던 일과 아빠 리처드와 엄마 미리엄의 관계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들으며 카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이 치유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새벽이 되자 잠에 빠져든다.
브릴은 잠든 카티아를 바라보며 세 살 적의 미리엄이 소니아의 품으로 달려드는 환상을
보고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실제와 상상은 하나이고 생각은 실제라고 여긴다. 이 세상에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조차 실제라고 여긴다. 옅은 잠 속에서 브릴은 여전히 죽기를
소망하지만 잠에서 깨어나자 의식이 돌아와 딸과 세상에서 고립되는 것으로 자신을 벌주는
것을 끝내가고 있는 손녀딸과 딸이 쓰는 원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나가려는 마음을 먹는다. 이 괴상한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고, 여전히 굴러가는
이 세상 속에서 딸과 손녀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브릴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도 실재라고 여기며 현실에서 가능하지않는 것을 한여름
밤의 꿈을 꾸듯이 가상의 세계로 피해보지만 육신이 몸담고 있는 그 실제의 세계로
길 떠난 여행자가 마음을 풀며 돌아다니던 여행지로부터 돌아오듯이 늘 현실세계로
돌아오게된다. 자신이 남편 리처드가 표현했듯 끔찍한 인간이 아니라고 아버지로부터의
위로가 필요한 딸이나 폐쇄적 생활로 자신을 벌주는 손녀에 대한 애정 때문에 브릴은 자신이
몸담고 싶어한 가상의 세계로부터 실제의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재의 삶은 예기치못한 불행과 가끔 행운도 있지만 거의 기이한 사건으로
점철되어, 청년인 카티아가 느끼는 인생은 비참하다고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하지만 그는
인생의 그 비참은 원래 당연지사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괴상한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이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해지길 원하고 그런 길로 접어들어야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