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바랄 것 없이 푸르른 날입니다. 티없이 파란 하늘은 거대한 사파이어 보석보다 맑고
깨끗합니다. 겨울이 그동안의 거친 입김을 서서히 거두어가는지 한 낮의 기온은
제법 올라가나 아침과 저녁과 밤은 아직도 서리 품은 옷자락을 흔들며 더 이땅에 머물려고
안간 힘을 쓰는지 사람들은 머리가 깨질듯 아프고 편도선이 부어올라 아픈 목으로 밭은
기침을 하며 떠나가는 겨울과 가까이 오는 봄 사이에 긴장감을 이기지 못합니니다.
어딘가가 아파도 아침이 되고 낮이 되고 밤이 오는 생활의 파도를 힘겹게 넘어가는,
살아있는 육체의 존재가 참으로 실감이 되는 나날들입니다. 흐르는 나날들 속에서 보통
잊으며 지나온 부단한 생활의 앞에 뒤에 어떤 어둡고 깊은 공허가 가득 찬 공간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들의 그 뒤에 헛되고 헛된 공허가 도사리고 있어 그동안 살아온 기억들의
대부분들을 먹어버리고 생의 공간으로 우리들의 등을 떠다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 공허의 깊은 함정 안에서 작은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점점 세찬 바람으로 변하여
불어대고 있습니다. 마음 안에서 부는 그 바람은 아주 어렸을 때, 자랄 때, 세월의 무상을
피부로 느끼는 지금에도 정말 까맣게 잊어버린 어떤 기억의 단편을, 이 밤에 전철을 타고
창 밖을 바라볼 때 검은 창에 어리는 밤풍경 위에 환영처럼 오버렙되는 그 자신의 얼굴처럼
떠오릅니다. 아아 저런 일이. 저런 일이. 눈길은 무심하지만 마음 속의 그 어둡고 허한,
자신의 몸과 마음 안에 있는 장소지만, 그 완벽한 어둠과 기억 상실의 장소로 결코 자신에
속한 곳이 아니었던 그 장소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바람에 불리는 나뭇 잎파리들처럼
세찬 회오리 바람에 마구 말려올라가는 나뭇 가지들처럼 지난 생활의 어떤 기억들이
어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가 함께 휘몰아칩니다. 예민치 못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순간들이 지나 이윽고 그 기억들이 쑤시고 부추긴 갖가지 감정들이 함께 휘몰아 칩니다.
예습이나 연습이 결코 허락되지않은 엄한 룰을 가진 생이라는 것을 살아내다보니 그간
얼마나 많은 실수와 그에 따른 이지러진 생의 모습에 흐르는 회환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뭐 그런대로 신은 관대하였고 이 정도의 생도 은혜라고 생각하며 지나온 그 세월 어딘가에,
자신도 모르게 숨어있던 복병이 튀어나와 칼을 휘두르듯이 부는 바람은 속수무책입니다.
몸 속에 어딘지 자리한 그 마음 속에 부는 바람은 광대한 네바다 사막에 불어치는 회오리만큼
격렬하다가 스스로 기진하여 어느 순간 사그러들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바람 속을
이리저리 휘몰려다녀 지친 마음은 스스로 얌전해지고한 순간에 튀어나와 깃발처럼 마음을
흔들어대던 옛 기억들은 남의 것들처럼 슬그머니 돌아앉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철저하게 남이 되는 순간 바람은 잦아듭니다.
이렇게 하늘이 파랗고 아름다운 날
그 하늘을 바라보며 광풍 속을 지나온 한 낮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