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은둔하기 좋은 계절이었다. 있는듯 없는듯 별 존재감 없이
조용히 지내오기 좋은 계절이었다. 전자파 차단 황토 담요를 뜨겁게하여 등을 대고 누워서
큰 창으로 검고 잿빛의 회색 구름들이 바람에 빠르게 느리게 흘러가는 하늘과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후는 금방 가고 어느 사이 깃드는 어둠에 먹혀가
슬그머니 밤이 되곤 했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들은 말이 없는 그 옛날의 흑백 실루엣 영화처럼 손에 한줌도
안되게 쥐여지는 실크 스카프처럼 하늘하늘, 기억 너머의 저 쪽 언덕으로 넘어가버렸다.
변하지않는 무대와 변하지않는 그 똑같은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그 같은 나날들 속에서
그림자같은 모든 환경과 인물들 속에서 단지 혼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감정이란
생물은 저 혼자 바쁘게 살아 움직였다. 희희낙낙 기쁨과 슬픔과 쓰잘데 없으면서도
강한 존재감을 표현하는 그 희노애락의 바이러스들이 이리저리 슬그머니 번져다니며
그려대었던 그림들. 때론 평화로운 수채화로 때론 기하학적이고 미친 색갈들을 드러내던,
때론 가슴뿌리까지 전율이, 그 나날들은 아무런 동요없이 무표정한 시선과 피부 밑에서
고요하게 잘도 흘러갔다. 바위 뒤에 핀 작은 풀꽃처럼 눈에 뜨이지않는 은둔이었지만
파란 하늘을 담고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담으며 혼자서 흔들리고 혼자서 웃으며 지냈었는데,
이제
겨울은 가버린 모양이다.
햇살에 온기를 더하고 봄 꽃들이 자기 자리에 서서 황홀히 생명들을
앞뒤를 다투어가며 터뜨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