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 요즈음처럼 위로가 되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철없던 청년의 때 자아에 가득 차서 만물을 주관하는 자를 인정하기가
참 어려웠다. 성격 자체가 인간본위였고 영혼이 늦게 눈 뜬 때문이라고
지금은 자신이 이해가 되지만
늘 같은 주위 사람들과 변함없는 환경과 건물들 속에서
인간들이 빗어내는 온갖 이야기들 속에서 뿌연 막이 드리운 내 영혼의
눈으로 창조주의 존재에 승복한다는 것이 참 어려웠다.
무엇보다고 나의 마음의 문 앞에 늘 엎드려 나를 쓰러뜨리려
호시탐탐 엿보는 죄의 정체를 인정하는 것에 오랜 시간을 허비하였다.
신앙적인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은혜를 입고 태어나 마라톤으로 치면
출발신호가 있기도 전에 출발을 허락받은 자들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헤매다가 세월을 보내고 늦게라도 깨달음을 얻는 자들도 은혜속에 있다.
현대사회에서 특별히 대도시의 거대한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자연이나 우리들이 대면하는 사건들 속에서 신의 섭리를
읽어내기란 쉽지가 않다. 인간이 인간을 복제해내는 단계에서
창조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야만하는 유한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온갖 자연과 살아가는 인간들의 그 숱한 사건들, 사연들을 허락하고 계신
창조주의 손길을 부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을 알았다.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면 이세상은 대단히 어려운 카오스
그 자체 일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의 목숨의 시작과 끝이
삼십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과 실날 같은 목숨을 잇고 계신
부모님의 늙으신 육체와 정신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에 선 중간자인 나는 나날이 낡아가는 소파의 천처럼,
퇴색해가는 옛날 사진처럼 윤곽이 희미해지고 머리가 희어져가고 있다.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은 로켓트도 우주로 쏘아올리고
동물도 복제하며 인터넷의 무한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무한대처럼 보이는 그 능력을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좇지않으면 이 지구는 그 언제인가 자멸할 것이다.
사고의 부족, 신념의 부족, 사랑의 부족, 희망의 부족 등등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가 제대로 취급되지않고
온갖 결핍과 부조리에 가득 찬 세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하면
기도할 수 밖에 없다. 문명의 발전에 따라 인간성도 기계화되고
황폐화 되가는 것을 막기위해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 그 하나님의
원리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채워나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