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

봄날

another woman 2008. 3. 26. 10:26

날이 초봄 같지않게 따스하다가 갑자기 겨울처럼 추워졌다.

찬 바람이 불고, 양화진은 한강가에 있어 그런지 다른 지역보다 유독 바람이 세고

춥게 느껴진다. 겨울에도 보면 길가에 얼음이 제일 먼저 얼었다.

사계절이 있는 한국의 기후가 너무 좋다.

이십 사년을 살다온 호주의 시드니는 겨울에는 물론 추위를 느낀다.

그러나 그 겨울에도 하늘은 여전히 가슴 저리게 푸르르고 아름다운

장미들이 피고 온갖 꽃들이 여전히 미색을 자랑하지만

집안에 온방이 안되어 어쩌면 한국의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그 곳은 사계절 구분이 안되어 거기서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계절마다 다른 풍취와 흐름을 느낄만한 마디가 없어

세월이 한꺼번에 쏜살같이 흘러가버리고만 강물 같아, 지난 날이 떠오르면

아름다운 기억도 많지만 돌아오지 않는 강을 바라보는  허전함도 뒤따른다.

 

이곳의 겨울은 완전히 회색이다. 늦가을 나무들이 그 많은 잎새를 대지로

떨어뜨려 완전히 벌거벗고 나면 온천지를 돌아보아도 회색 뿐인 겨울의 찌푸린

진하고 흐린 회색의 구름과 운무가 먼 하늘부터 이웃집 지붕에 걸린 하늘까지

가득하다.  하늘과 높고 낮은 빌딩들 숲에 창마다 쌓인 먼지들과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빌딩 계단들의 더러움 등에 싸여서 사람들의 물결이 이리로 저리로 밀려다녔다.

그 거리의 커다란 시멘트 화분의 흙은 한 덩어리처럼 굳어있고 화초 가지들은

굵은 밑둥과 몇 가지만 남아서 때로는 어느 숙녀가 지나가며 몰래 뭉쳐버린 껌껍질

등이 어떤 흔적처럼 보인다. 추위가 싫어 걸치고 나간 외투가 벗고 싶어지는 한낮

지나가다 그 시멘트 화분을 드려다보면 새로이 돌아오는 봄이라고 몸으로 말하듯

초롯빛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다.  주유소의 화장실 곁에 선 목련도 꽃망울을 터뜨리고

우장산 길 좌우에 열병식을 한 개나리도 앞 다투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 봄이 왔구나.

봄은 눈으로 보았지만 가슴으로 맞이하게 된다. 이 따스한 봄날에

묵은 것을 벗고 새로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뭔가 생기있고 빛나는, 이제는 슬그머니 반항하던 태도를 버리고

창조주께서  맨처음 그 자녀들에게 희망하셨던 그 소망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애쓰는 그 많은 선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어서,  한번만 허락하신

이 세상 안에서 그 분의 빛나는 생명을 피우는 자들의 대열에 함께 하고싶다.

 

국민학교 다닐 때 큰 언니는 정신여고생 이었다. 키가 좀 작지만 유난히

흰 피부에 눈꺼풀이 얇은 큰 눈의 그녀는 상냥했지만 엄한 구석이 있어

세살 터울의 남동생에게 시비를 건 날 들키면 엄마는 그냥 웃고 마시는데

늘 큰언니가 둘다 방비로 손바닥을 때렸는데 물론 시비를 가려 잘못한 아이는

(주로 나였지만) 한 두대 더 맞았다. 사학년 때 방과 후 골목에 놀러나가기 전에

가끔 훔쳐본 그 언니 노트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말라

등의 말이 써있었다. 그렇게 슬픈 일이나 노할 일도  많지 않았던

그때는 이것이 무슨 말일까 삶이 어떻게 속임수를 쓸까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이제는 거의 끝자락에 다달아 삶이

어떻게 속이는지도 알고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속이는지도 어떤 면에서

서글픈 통달을 하였지만 역시 봄이라는 것은 마음과 가슴이 함께 설레이게 한다.

 

봄은 겨울이 있어서 더욱 빛난다.

삶의 고비고비마다에서 맞았던 겨울이나 봄들을 생각해보면

겨울이 지나간 후의 봄이 우리들을 생의 한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마디 인 것을 알겠다. 창조주께서는 마음 아프게 사랑하는 그 자녀들에게

그들이 삶의 진수의 귀한 진주를 얻게하기 위하셔 생의 겨울이 몰아닥치는 것도

허락하신 것이 그 분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한 방식인 것을 알겠다.

 

'그냥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날 오후의 외출  (0) 2008.03.28
보고 싶은 사람들  (0) 2008.03.27
제목 없음  (0) 2008.03.24
제목 없음  (0) 2008.03.24
제목 없음  (0) 200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