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몇날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낙엽들이 반이상
지고 날이 춥다. 가을은 그치지않고 퍼붓던 비와 함께 철수해버린
모양이다. 일주일 이상을 진회색 하늘이 품고있는 물기가 너무
무거운듯 내려앉기만해 회색 하늘과 땅 사이에 낑겨있는듯,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집집마다 한 마리씩은 있는듯한 개들도 어디서인지
하울링을 시작하면 서로들 따라서 화답하면서 긴 신음을 내뿜는 것이
을씨년스러웠었다. 어머니도 전화를 할 때마다 며칠 비가 이렇게 나리니
왠지 우울하기만 하구나 말씀하셨다. 사람과 활동을 해야하는 생명체들이
비에 며칠 갇히니 왠지 사고가 정지되고 기분이 우울모드로 바뀌는
모양이다. 그러다 한 날 하늘이 푸르르고 끝없이 높고 깊어보이고 환한
햇살이 넘쳐흐르니 온 피부가 참았던 숨을 내쉬듯이 살 것 같았다.
바쁘게 지나치려는 가을을 따라 왠일인지 경황이 없어 아직 단풍 사진
하나 찍지못했다. 보도에 뒹구는 낙엽들을 보면 저 고운 색들이 죽어가기
전에 몇 장 찍어두어야할터인데, 숙제를 아직 하지못한 학생같은 마음이 든다.
이 곳은 차라리 주택가 근처 길가에 이쁘게 단풍든 나무들이 많다.
단풍을 보러 어디를 정해놓고 가기가 어려운 것이 외곽으로 나갈 수록
황량하고 잡목들만 무성한 까닭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으니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달라는 최향숙의
노래가 떠오른다. 친구들이 좀 있었어도 늘 단짝이 있었던 외골의
성격이었는데 나이도 가을 나이가 되고보니 이제는 온갖 푸념을 들어줄
특별한 단짝이 없는 것을 발견하니, 편지를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보아줄
사람에게 보내겠다는 노래 가사가 실감이 간다. 가슴 속에도 비가
나리고 낙엽들이 휘날리며 떨어져간다. 침잠하고 침잠하라.
공책 한 장 만한 가슴이지만 또 황량히 넓기도 한 그 가슴에 쌓여있는
생의 잔해들과 삶의 시체들, 옛날 옛적부터 쌓여 내려오는 온갖 생의
희노애락들의 지층. 그런 것들이 이렇게 맑은 가을 날이면 또렷이,
선명하다.
에덴 동산에서의 우리들의 삶은 청명하고 선하고 맑고 아름답고,
인간이 가진 온갖 수사어를 동원해도 표현이 어려울만큼 천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죄란 언제나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한지라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들의 숙명이었으므로 지금의 세계는 혼탁
하기만하다. 넓고 광활한 대양을 주인없는 섬의 형체로 떠돌아다닌다는
거대한 바다 쓰레기, 어둡고 공허하고 허무한 우주에 어떤 궤도를 따라서
돌고돈다는 우주 쓰레기 더미들.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우주에
까지도 만들어버린 어쩌지못하는 그런 쓰레기 더미들과 너무 흡사하게,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거대한 윤회를 만들어 떠도는 죄의 조합들.
그런 죄들이 이렇게 푸르르게 가슴 저리게 맑은 날에는 어느 한 날
이윽고 몸에 입혀질 수의처럼 느껴진다. 결국에도 벗어버릴 수 없는
숙명의 죄성들. 죄들...
그러나
눈이 부셔서 눈시울이 감기도록 빛나는 햇빛에 밝히 보이는 축복들이
온갖 자연에는 가득하다. 그 축복을 함께 받도록 소원하는 우리들이
이 한 낮에 드리는 기도에도 햇살이 찰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