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 밑 벤치에 초라한 입성의 한 늙은 남자가 앉아있다.
앉아서 발 밑에 떨어진 연분홍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철로 보면 분명 아직은 겨울이어야하는데 이렇게 슬그머니 스며온 봄은
별 입지않아 지난해 세탁하지않은채 보관하던 옷주머니에서 뜻밖에 발견한 오십불 짜리 지폐처럼,
아끼고 애착했는데 잃어버린줄 알았는데 몇 해나 입지않던 가죽잠바의 주머니에서 나온 선그라스처럼,
이렇게 나타나 아직 두터운 세타 속의 가슴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다.
어느 시골 여관 사무실에 붙어있던 아주 옛날 신문의 한 사진처럼 여겨지는 기억.
출장을 다녀오면 아이는 제 엄마 치마꼬리를 잡고 그녀의 뒤에 숨어서 낮을 가렸었다.
그동안 하염없이 세월이 흘러간탓에
비록 이마와 눈 밑에 주름이 가득하고 볼살은 버림받은 개꼬리처럼 쳐져버렸지만
지금 나도 그 아이처럼
냉혹한 삶의 끈질긴 추궁을 피해서 그녀의 치마 뒤에 숨어서 조용히 살 수도 있지않았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이제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않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도 희미해져서
이제는 삼인칭이 된 그녀는 거리 어디서나 존재하고 또 어디서도 존재하지않는다.
이런 봄은
과거에도 숱하게 찾아왔고
미래에도 연달아 흘러들어올 것이고
지금은
벌써 왔다.
따스한 봄빛이 고맙지만
이토록 곱디고운 분홍꽃은 과연 쳐다보아도 되는 건지,
그 남자는 헐어빠진 구두를 포도에 비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