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향나무 박수현시인의 시입니다.
묘지
오후에는 마을 한 바퀴를 돕니다. 풀밭에는 한 생을 직사각형으로 요약한 묘비들이 소풍객들 마냥 햇볕을 쬐며
놀고 있습니다. 뿌리를 잘 내린 무덤들은 무성해서 묘비 앞에 놓인 꽃송이는 그의 생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웃습니다.
사려깊은 베고니아와 제라늄 사이로 풀뱀 하나가 지나갑니다. 이마가 환한 산딸나무는 아직 고요의 궁극에 다다르지
못해 뱀의 흘림체 변명을 숨겨줄 수 없습니다. 귀퉁이가 깨진 묘비 위에 잠시 검은 머리 오목눈이가 흉터처럼 앉았다
날아갑니다. 눈과 귀와 슬픔이 쉬이 바랜 마음들도 깃털처럼 공중으로 흩어집니다. 아직 붐비는 문장들을 지우기위해
어떤 묘비들은 검은 건반을 두드릴 먹구름과 비가 수시로 필요할테지요. 그 중 한 기는 고집스럽게 외면했던 내 삶의
안쪽이 묻힌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덩굴 장미에 등허리가 휘감긴 검은 대리석 묘비는 다정도 무정도 아닌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앞 웅크려 졸고있는 길고양이는 뚜껑이 깨어진 오르골처럼 가르릉거립니다. 햇된장처럼 노란 햇살이 손목을 뻗어
묘비의 옆구리를 감싸 안습니다. 누가 돌아온 것 일까요. 첨탑이 달린 종루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 자꾸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제발 눈물 고여 껌뻑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지는 마시기를, 후회도 없이 물컹해진
눈가로 그림자들이 모여드는 저물녘, 몇번이나 고쳐 읽었던 문장들이 저만치 숨 죽이며 까치발을 들고 지나갑니다.
다만 미처 도착하지않은 당신의 고백은 읽지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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