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왠지 한번도 겪어보지못한 더위같이 열기에 휘둘리며
어떤 것을 할 엄두를 못내고 가만히 살려져있는 것만으로 벅차다.
이런 기후에 가득 찬 답답증을 깨뜨리듯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 마흔 두살 먹은 그녀는 십대 후반의 두 아이들을 태우고 친정에 가다
신호 대기에 서있는데 그녀 쪽으로 달려온 차에 들이박혀 골반이 내려앉고
얼굴이 비틀려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장례 기간에 아이들은 병원에 있어야했다. 주일 예배를 마치자
천안으로 와서 그녀가 잠시 다녔다는 교회버스에 합승하여 보령으로 향하였다.
이제는 온 국토가 아파트 숲이 여기저기 있어 아주 빛나는 초록의 물결이
살랑거리는 논들의 행렬을 지나면 작은 도시 모양의 읍들이 나타나고
그 옆이나 뒤를 아파트촌이 호위병처럼 버티고 서있다.
우리들은 간밤에 부음으로 잠을 설친 얘기를 끝으로 말문을 잇지 못하였다.
상주로 남편과 결혼을 하였다는 큰 딸과 사위가 서있다가 일행을 보고 곡을
시작한다. 향도 피워놓고 흰국화에 싸인 긴 생머리의 그녀는 너무 귀엽고 행복해보여
왜 그곳에 자리해있는지 잠시 의아해진다. 목사님을 붙잡고 뭔가 이야기하는
눈이 크고 얼굴이 노오란 남자는 어딘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뭔가 바르지않는
뭔가가 피부에 잠식해있는듯 스며나오는 어떤 부패한 힘이 느껴진다.
우리들은 아들이 있는 병원에 가기위해 서둘러 그 곳을 나왔다.
누군가 그녀가 전도사로 일하며 간호사 공부를 하고 자원봉사도 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이 이 사고로 손해보시는 거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바로 대답했다. 하나님이 그녀의 고달픔을 불쌍히 보시어 그만
품으로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누구의 말이 더 타당할지 알수 없다.
그렇게 애띠고 이쁘고 상냥하고 신앙이 깊은 그녀가 살아온 곳이
불신자의 집안에 노름쟁이에 바람기도 있는 나이많은 남편에 전처 소생의
딸이 둘이나 된다고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왜 그런 결혼을 하여야했으며
그녀는 왜 그 새벽에 친정에 아들과 딸까지 데리고 나섰을까.
소설이나 연속극 등에서도 많은 사연들이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다가 결말이
가까울수록 선하거나 행복하거나 그저 무덤덤하게라도 해결이 되면서 끝나는데
그녀의 세상의 삶은 그냥 카오스 속에서 어느 결말도 예측 못한채 한 순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 세상 어디에서는 어떤 이는 나이가 많아 삐들삐들한 오이지처럼
말라서 치매에 걸려서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모독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젊음을 지닌채 지난 밤에 내린 비에 져버린 꽃잎처럼
초록빛 들판의 나무 그늘에서 언듯 발견되는 작은 새의 죽음처럼,
그날 새벽 그곳에서의 그녀의 이세상으로부터의 퇴장은 너무 갑작스럽고
번개처럼 일어났다가 지나갔다. 그녀는 동기들 중 나이가 막내에 가까웠다.
만나서 사귀는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같이 보내는 시간도
공통화제도 필요한데 헤어지는 것은 이렇게 단칼에 이루어지니
돌아오는 교회버스 안에서 누군가는 필요이상으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