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국인 노인이 노르망디 미국인 국립묘지에 와서 1944년 6월 13일에 사망한
존 밀러 대위의 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옛날의존 라이언 일병이다.
라이언의 두 형제들이 전투에서 사망하였고 세째는 뉴기니 작전 중에 사망했다.
대장은 세 명이나 국가에 바친 라이언의 어머니를 위하여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고
밀러 대위에게 명하였다. 대위와 일곱 명의 대원들은 두 명의 희생자를 내가면서
라이언 일병을 찾았지만 그는 형제들과 같은 전우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고
버티자 밀러 대위는 함께 그 전투에 참여하여 그를 구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의 인원으로 막강한 적들을 감당하기 부족하지만 밀러는 일병을 곁에 두고
보호하며 전투를 하다가 총상을 입고 연합군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즈음 라이언
일병에게 제임스 헛되게 하지 마라... 헛되게 하지마라며 숨을 거두었다.
라이언을 위해 출전한 그들 중 단지 두 명의 대원 만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었다.
시민이 된 라이언은 평생 그들의 죽음을 잊지못하고 대위와 대원들의 몫까지
충실히 살아내려는 강박증을 가지고 살았을 것 같다. 곁에 와 위로하려는
아내에게 과연 자기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잘 살았은가 안타까이 묻는 모습에서
그의 괴로움이 느껴진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저당잡고 살아온 것 같은 자기
생의 모습은 과연 의미가 있었으며 그 생을 위하여 다른 이들이 과연 죽을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그의 눈물과 회한을 읽으며 밀러 대위가 자신들의 죽음을
헛되게하지 말기를 원하며 죽어간 것을 생각하게된다. 대위는 군인이고 명령에
충성하기위해 자기의 목숨을 잃더라도 라이언 일병을 살려내었다.
당시 대위의 헛되게 하지마라는 라이언이 꼭 살아돌아가야지만 자신들의 죽음이
헛되지않는 다는 의미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에게는 자신의
삶이 자기 때문에 죽어간 그 대원들의 삶까지 더 얹어서 헛되지않게 살라고
자신의 삶이 진 무게로 여기지않았을까.
이제 흰 머리와 수염으로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맞추어보아야할 때가 왔다고
느끼고 노르망디의 묘지로 와서 밀러대위의 묘 앞에 서서 과연 자신의 삶이
이들의 죽음들을 헛되게 하지는 않았나 가슴을 조이는 모습이 감동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죽었어도 이런 회한의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를 위해 죽으신 분에게 매 주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그 고백이 단지 습관이고
형식처럼 하는 것을 돌아보게된다. 왜 일까. 라이언 일병처럼 옆에 같이, 총탄이
퍼붓는 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그가 자기를 위하여 죽는 것을
눈물을 흘리며 보았기 때문일까. 이천 년 전에 돌아가신 그 분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시고 그 신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데 왜 교리로만 여겨지고
그 교리는 현장에서 같이 나눈 그 죽음보다 힘이 덜한 것일까.
육신을 가진 자라서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몸과 영으로 함께 체험해야지만
진실로 믿어지는게 아닐까 마음 속의 또 다른 자기가 주장할 때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보다 신이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는 그 위대함을
내 그릇의 사소함과 비겁함으로 헛되게 보낸 지나간 생을 밀러 대위 앞에
서서 눈물 짓는 라이언처럼 돌아볼 때도 되었고 돌아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