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무엘 베게트의 고도우를 기다리며 동우님 리딩북에서 읽었습니다.
버드나무 아래, 디디라고 불리는 블라디미스와 고고라고 불리는 에스트라공은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고도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도우는 곧 온다는 풍문만 무성할뿐 그때가 언제일지, 매일이
하염없이 흘러도 나타나지않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그들에게 소년이 나타나 오늘은 고도우가 못오지만
내일은 꼭 올것이라고 전하라더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긴 기다림에 지쳐 실없는 대화들을
나누며 당근이나 무를 먹으며 그들이 없는 사이에 고도우가 올까봐 그 자리를 떠나지못합니다.
뽀조가 끈에 묶인 릭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말들을 나누고 그는 사라집니다.
오지않는 고도우에 대해 지친 그들에게 뽀조가 장님이 되고 릭키가 벙어리가 되어 나타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고 소년이 다시 나타나 고도우는 오늘도 오지못한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어제 왔던 네가 아니냐니 소년은 자기는 어제의 그 소년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그래도 언젠가 고도우는 꼭
올것이라고 자신을 세뇌하며 버드나무 밑을 떠나지 못합니다.
누군가 베케트에게 고도우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는 자신도 모른다고 아마 알았다면 작품에 누구라고
쓰지않았겠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고도우는 각자 다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살아 생전에
꼭 성취하고싶은 어떤 희망이, 살 소망을 잃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그 어떤 것을 기다리고, 기독교인이라면 지금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으며 예수가 곧 재림할 것이라는 풍문이 파다하니, 고도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인지도 모릅니다.
생명을 지닌 것들의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론 스스로가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긴 기다림의 자세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현세의 소망들은 채워지고
나면 또 다른 소망들이 와서 기다립니다. 그치지않는 육신 적인 소망의 이루어짐을 기다리는 것에
가리워져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조차도 무엇인가 오기를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뽀조의 채찍에 휘둘리는 릭키의 모습을 보며 뽀조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모순이 지닌 폭력자이고
릭키는 그 폭력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많은 생들을 대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무엇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면서 예수의 처형 당시 양쪽의 강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디디와 고고를 지나쳐갔던 뽀조와 릭키가 제2막에서 되돌아오는데 뽀조는 장님이
되어있고 릭키는 벙어리가 되어있었습니다. 인생이 늙어 개인적인 종말이 가까워질 수록 보지못하고
말하지못하는 것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다시 지나쳐가고 디디와 고고는 그날도 오지않는
고도우가 앞으로도 오지않으리라는 예감을 가지고도 고도우가 오기로한 메마른 버드나무 밑을
떠나지못하며 글은 끝났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은 그저 고도우가 올터인데, 심정적으로 애쓰며 기다리는 일을 그만 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저 서성이며 무엇인지 누구인지 언제올지 모르는 고도우를 기다리는 것이 인생의 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가득 한 나날들은 어차피 주어진 것이고 살아내야하는
것이라면 현재 지금의 모든 여건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자신이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고도우들을 발견하여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이루면 좋겠습니다.
사진 속의 정원은 지인의 뒷마당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아침마다 저녁마다 가꾼 그 정원은 참
아름답고 꿈과 평강이 느껴집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숨들이라면 누구나가 자기의 가슴 속에
저런 정원 하나는 가꾸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생깁니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떠올리지않더라도
어떻게 보면 허무하고 참 공허한 목숨이구나 느껴질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성으로
눈에 보이지않는 집을 짓고 살아있는 날까지 그 집 마당에 꿈과 희망과 소망이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이쁜 정원을 가꾸며, 어느 날까지인지 결코 오지않는,
고도우를 기다려간다면 스스로에게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