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국민학교 삼학년 때 학교 행사에 마땅한 옷이 없어 내가 신혼 적에 입던
홈드레스를 입고 가장 친한 친구 빅토리아와 찍은 사진이다.
빅토리아는 이혼 한 엄마와 언니와 살고 한달에 한번 씩 재혼한 아빠를 만났다.
어느 회사 비서 였던 엄마는 자신의 수입으로 두 딸을 기르기 힘이 들었던지
시드니에서 3 시간이상 운전해야가는 뉴카슬로 이사가 두 애들은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공부도 잘하고 아주 똑똑하기도한 그 애는 고등학교 만 나와서
더 북쪽인 해밀턴 아일랜드로 직장을 얻어가고 세월이 이십년이상 흐른 다음에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다. sbs방송국에 어떤 부서의 책임자라고 한다.
혼자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좋지않은 환경에서도 바로 살아가는 그 애를 보면
영혼 속에 어떤 타고난 고귀함이 느껴진다.
아빠가 재혼한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둘이 있는데 그엄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아빠는 게이가 되었다고 한다. 빅토리아는 시간만 있으면 그 두 이복 남동생들을
돌보아왔고 자신의 생모를 보살펴왔다고 한다.
중산층 이상의 호주인들은 보수적이고 정상적으로 사는 집이 더욱 많은데
특별히 이쁘고 착하고 영리한 그애는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환경에 굴하지않고
튼튼한 자로 서가는 것에 어려서 그애가 하던 말이나 눈빛이 참 마음에 들던 것이 생각난다.
작은 유니트지만 집도 자기 힘으로 두채를 사놓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도 결혼을 했다니
사람이 살아가는 일의 부단함에서 일단 그애가 놓여난 것 같아 안도가 된다.
이번 겨울 시드니에 다녀온 딸은 빅토리아와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한다. 요즈음의 그애가 너무 보기좋아 두사람의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축배를 들었다고한다.
부모와 형제들과 살았던 기간보다 결혼 한 이후의 인생이 훨씬 더 길고 숨차고 즐겁고
뭔가 꼬집어내어 말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고 의미를
깨닫는 것 같다. 부모의 보호 하에 밋밋하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오다가
일단 결혼하고나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게된다.
광야에 던져지는 작은 새들 처럼 때론 본의 아니게 험악한 생을 살기도한다.
어느 곳에 있던지 자신을 바로 지키며 열심히 살아 열매를 거둔 빅토리아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그 오랜 세월동안 지녀온 우정이 앞으로도 아름답게 이어질 것을 믿는다.
내게도 국민학교 이학년 때 친했던 친구를 사십 중반 까지 연락하며 지냈었다.
그때 그애는 미싱회사를 경영하던 아빠와 심장이 안좋아 얼굴빛이 늘 검던 엄마와
네동생들이 있었다. 안암동 오가의 다닥다닥 붙은 한옥동네에서 그애 혼자만
정원구석에 그네가 있던 양옥집에 살면서 생일파티 라는 것을 했다.
눈썹이 유난히 짙고 얼굴이 하얗고 이뻤다. 초등학교 졸업 할 무렵 그집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재혼하셨다. 그러면서그애는 돈암동 근처 새주택으로 이사가고
우리들은 뜸하게 만나게 되었다.
동생들을 대학 보내면서 본인은 정작 대학에 못가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는데 가보지 못하였다.
아들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애는 남편을 잃었다. 눈이 몹시 퍼붓는 날
드라이브를 가겠다고 나서는데 그애는 바빠서 작은 애가 같이 가겠다고 나갔다고 한다.
그러다 남편이 곧 돌아와서 아이를 내려주고는 혼자 나갔는데
두어 시간만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와 가보니 마주 오던 유조차를 들이박아
혼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해마다 정초면 우리 열심히 살자고 큰 글로 쓴 카드가 왔었다.
그리고 두번 째 서울에 나갔을 때 그애를 만났다.
초등학교 때의 그 고운 자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애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마음이 메어지던 나는 같이 우는 대신 표정이 경직되고 아무 말도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애의 생의 고단함을 마음에 닿게 위로하지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그리고 몇해 더 카드를 주고 받았는데
언젠가부터 카드가 오지 않았다. 이사를 갔던지 할터인데
그애의 시집 주소로 그애가 경영한다는 미용실로
몇번 편지와 카드를 보내었지만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서울에 와서는 인터넷 검색으로 인천 어느 동의 윤 미용실을 두둘겨
몇군데 전화를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난 안다. 어느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이 가진 좋은 점을
잃어버리지않고 지켜가며 꿋꿋이 살아낸다는 것을.
그애도 빅토리아도 험한 인생을 철저히 맞서서 살아내어 이겨나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