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이면서 우리 두 사람 외는 아무도 없는 실미도에서
눈덮인 해변과 연 잿빛 흙갈색의 갯벌, 푸르른 하늘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걸어다니며 즐거웠다.
두사람 다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찰영지가 있다는 것은
나와가지고 알았지만 곧 밀물이 있다길래 돌아가지 못했다.
그동안 광활한 푸른 바다와 거친 파도, 갈매기 떼들에 익숙했었는데
작은 산과 회색의 갯벌과 희끄므레한 바다를 보니까 꼭 수묵화를
보는 것 같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어느 포근한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때때로 잠시이나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와
위로와 안정을 얻고 떠나가지만 몇년전 그 곳에서 비디오로 본
실미도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그 젊고 절망과 소망을 함께 품은 낭떠러지 가로 거칠고
험한 운명의 손길에 떠밀렸던 그들. 그 혹독하던 훈련과
생존의 사선에서 절박하고 강렬하던 그들의 목숨과 의지들.
결말은 며칠이나 나를 우울하게 했었다.
이 곳에서 영화의 몇 장면을 떠올려보니 강도는 약하지만
그때의 그 충격이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일이 벌어졌던
이 실미도는 모든 것을 포옹하고 삼키고 시침을 떼며 고요히
겨울 가운데 떠있다.
목숨을 가진 인간들의 타고 난 어떤 불평등을 우리들은 운명이나
팔자라고 부른다. 몇칠 전 전철에서 본 어린 소년이 어색하고 어쩔줄
모르며 내밀던 껌 한통. 부모를 잘 만났으면 학교가고 학원가고
컴푸더로 게임하고 공부하고 할터인데. 그 젊은 나이에 재소자가 되고
정부의 엄청난 계획의 도구로 목숨을 건 훈련을 받다가 계획이
무산되자 죽어야만 했던 그 분노와 원한에 가득 찬 인생들을 무엇이라 말해야하는지.
그러나 이 세상에 편재해있는 불공평과 철저히도 냉정한 운명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던 것도 젊은 혈기의 특권이었는지 나이든 지금은
조물주는 사랑이시고 공평하신 것을 믿는다.
조물주의 그 사랑의 실체를 인간인 내눈으로 보고 평하기엔
자신이 너무도 형편없이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우며 생각이 없는 자라는 것을 안다.
베란다 흰 인공토 화단에서도 저렇게 푸르른 남촌 나무가 나에게
너는 창조의 섭리에 숨겨진 창조주의 가슴이 터질듯한 사랑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고 충고한다.
이 세상에 깃든 온갖 불행과 비참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육신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며 이룩한 인간들의 결과이며 인간들은 조물주의 자비를 바랄 수 밖에
없다고 속삭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