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 생각이 계속 나는 이유가 세살 쯤 되는 어린아이 때문인 것을 알았다.
핑크빛 반바지와 티를 입고 찜질방으로 가는데 커틴 입구에 커다란 화면이 있고
어지러운 영상이 나오는데 아이는 화면에 찰싹 붙어 그 곳을 하염없이 보고있다.
나도 모르게 아가야, 눈 나빠진다. 하니 아이는 순간 돌아보고 다시 화면에 달라붙는다.
그 총 천연색의 어지러운 색갈의 운무는 아이의 정신을 홀리고 있었다.
찜질방 중앙의 대형 텔레비젼 앞에는 남녀 어른들이 이곳 저곳에 눕고 앉아서
얼음이 든 식혜를 마시거나 배를 깍아먹으며 얘기하기도 하고 연속극에 열중하기도한다.
아이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숯방이나 황토방 같은 곳에서 잠이라도 든 것이 아닐까.
아이가 저런 네모상자에서 나오는 화면에 길들어가면
자연히 방콕하여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이나 기계가 몸에 배이고
그 영혼이 기계화되는 것은 아닐까. 아날로그 시대의 한 사람인지라
기계를 싫어하고 학교 과제물 때문에 간신히 기초만 익혔던
나인지라 기계에 대한 반감이 있다. 기계가 주는 그 편리함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데도 장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단점만 되새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가령 이메일을 예로 들면 편지지나 봉투를
사러나가지도 않고 우표를 사러 밖으로 갈 필요가 없다.
잘못 쓰면 새 편지지를 쓰거나 고무로 지우며 흔적을 남기는 대신
백스페이스를 누르면 다시 새화면이 된다.
편지지만 컴퓨타 앞에 앉아 몇줄 쓰고 전송을 누르면 되니 편하다.
그러나 연필로 쓰는 편지가 주는 정서와 낭만은 어디에도 없다.
국민학교나 중학교 다닐 그 옛날 정기 행사로 군인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면 멋진 연필 스켓치가 들어있던 답장을 받던 기쁨도 없다.
현대의 핸드폰을 보면 네비게이션, mp3, 리모트 콘트롤 등등
성냥곽 두세배 만한 그것의 기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직 문자도 못보내는 실력의 나는 그들이 지닌 기능에 주눅이 든다.
현대의 인간들이 창조해내는 것들을 보면 과연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구나 실감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물에서는
생명과 사랑을 느끼기가 힘드는 것은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책상 앞에서 푸르게 번성하는 남촌나무에서 창조주의 사랑과 생명을
느끼는데 그 아기가 붙어있던 게임 화면에서는 불안과 어지러움 만을 느낀다.
기계가 주는 비정함에서 사랑과 잘못 만지면 고장이 나
고칠 때 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더욱 생명을 느낄 수가 없다.
요새 시절의 엄마들에겐 더욱 힘든 타스크들이 부과된 것 같다.
기계문명 속에서 아이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그 엄마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까.
곰보추탕 집이 유명하던 안암동에서 자란 나는 학교 다녀오는 길에
만화책 방에서 미미와 리리 같은 만화를 실컨보고
저녁 먹은 후는 동네 남자 여자 애들과 어울려 옆 동네 애들과
연탄재를 던지며 전쟁놀이에 열중했고 늦은 여름밤에는
골목에 놓인 군용침대에 모여 앉아 나이 든 오빠들이 하는 귀신얘기들을
들으며 잘때는 얄개전이나 톰소여의 모험 같은 것들을 읽다가 잠들었있다.
그때도 할머니들께서는 옛날이 좋았다고 하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가 들어 옛날이 좋았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